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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일본 불매운동 이후 토지로 유명한 박경리 선생님의 다른 서적이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바로 '일본산고'라는 책인데요. 일본인에 대해서 꿰뚫어보신 그 통찰력이 매우 날카롭고 놀랍습니다.

 

 

아래는 한 네티즌이 일본산고 중 일부를 발췌한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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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요즘 일본에 관하여 거론한다는 자체가 일부 참신한 지식인들 귀에는 사양의 만가(挽歌)쯤으로 들리는 모양이고 민족주의자의 촌스러운 몸짓으로 보이는 모양인데 그것은 과거 강자(强者)의 논리가 아직 건재해 있음을 의미한다.


- 여하튼 이른바 새로운 친일인사에게 민족주의의 극복, 세계주의 표방 같은 것은 빌려 입기에 그보다 지적이며 안성맞춤의 것이 달리 없을 것이다.


- 그러나 바로 그러했기 때문에 기능과 세기(細技)가 우수하면서도 일본은 항상 남의 틀과 본을 훔쳐오거나 얻어 와서 갈고 닦고 할밖에 없었다. 본과 틀이 없는 나라, 그들의 정치이념은 창조의 활력이 위축된 민족을 만들었던 것이다. 오늘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 자살은 일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용감한 사람만이 자살하는 것도 아니다. 흉악한 범죄자도 자살하고 천하의 독부(毒婦)도 자살하고 삶을 이길 수 없는 무력한 사람도 자살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고통이 적은 방법을 취하는 것이 본능이다. 추악하고 잔혹하고 야만적인 그 자살 방법에 일본은 그야말로 긴란[金襴], 돈수[緞子], 비단을 휘감아서 미화하고 일본 정신의 표본으로 자랑한다.


- 일본의 팽창주의는 과거와 다를 것이 없다. 그 해악도 다를 것이 없다.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 혹은 무관심을 나타내는 일부 지식층의 이상주의 혹은 지성을 나는 지적 허영으로 본다. 토지의 일본인 오가타 지로[緖方次郞]는 코스모폴리탄이다. 그는 강자 편에서, 가해자 편에서 양심을 지켜 비판하는 세계주의자다. 그러나 피해자가 불이익을 안고 과연 평등의 세계주의로 갈 수 있는 걸까? 허구요 망상이다. 한국인의 반일이 모두 그런 논리에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분풀이라는 본능적 감정인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정치적 차원이지만 일본인의 의식도 간과할 수 없는 만큼 일본은 왈가왈부할 처지가 못 된다. 그것은 과거의 잘못보다 오늘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국인의 분을 풀어주지 않았다.



물질로 환산할 수 없는 피해였지만 그들은 거의 보상하지 않았다.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통분이 무슨 사과인가? 그러고도 욕을 안 먹겠다는 것은 뻔뻔스런 일이다.



- 왜 하필 일본에 핵폭탄이 떨어졌는가. 그 원인을 그들은 말하지 않는다. 남경의 30만 양민 학살에 대해서도 그들은 말하지 않는다. 아니, 말한 적은 있었다. 한때 소설을 썼고 정치가로 변신한 이시하라[石原]라는 위인이 외국 기자에게 남경 사건은 조작된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어디 남경 학살뿐이랴. 그러나 그 비행을 일일이 거론하는 것에 사실 우리는 지쳐버렸고 힐난하는 처지에서도 차마 입에 담기 부끄러운 사건들, 하지만 그들은 거론하는 데 지친 것도 아니며 부끄러워서 침묵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열심인 것은 원폭의 기념탑을 세우고 공원을 조성하고 그들 자신이 피해자임을 세계만방에 고하는 일이다.


- 칼은 물리적으로 육신을 구속하고 현인신은 정신을 사로잡고, 이같이 옥죄이는 공간을 상상해볼 것 같으면 참 이상하다. 괴기한 것들이 떠오르니 말이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이 있고 손바닥만 한 연못에는 성냥개비 같은 다리가 걸려 있고 생명을 일그러뜨린 분재가 보이고 세련된 포장, 장 종지 같은 작은 술잔, 손가락 끝에서 노는 앙증스런 우산 하며, 기능으로 갈고 닦으며 달려온 역사의 비극을 소름 끼치게 느끼게 한다. 비상을 꿈꿀 수 없는 사로잡힌 영혼에게 깃드는 것이 허무주의다. 그리고 쾌락이다. 남경 학살, 백주의 난행은 일본군의 전략이지만 뒤집어 보면 그로테스크와 에로티시즘의 여실한 참극, 절망 없이 그 짓을 했을까.


일본 문학에서 탐미주의가 정점을 이루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썩어가는 육체, 괴기스러움에 대한 쾌락, 그것은 일종의 도피다. 자살의 미학도 실은 일그러진 사디즘을 포장해낸 것에 불과하고 삶을 정면 돌파하려는 의지의 결여로 볼 수 있다. 산다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또 아름다운 것도 없다. 진실 자체이기 때문이다. 진실의 추구야말로 문화의 시발점인 동시, 발전의 과정이기도 하다.


- 물론 학생들이 일본을 모른다는 것이 학생들의 잘못은 아닙니다마는 마지막 꼭 해두고 싶은 말은 결코 일본을 모델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 자연도 그렇고 인간사도 그렇고 괴기스러움이 횡행하여 별의별 일들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사고력은 마비되어 무의미해진 시간이 마구잡이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비판 없이, 숫제 생각 없이 일본을 닮아가는 것이 문제지요. 그러나 그보다 경제대국이라 하여 그 문화까지 격상하고 무한한 동경과 찬사를 아끼지 않는 줏대 없는 식자가 날로 늘어나는 현실이 걱정입니다.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일본의 군비 확장은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일본인을 포함한 인류의 적신호입니다.





(아래는 어떤 일본인이 쓴 "한국인의 '통속민족주의'에 실망합니다'라는 글에 "일본인은 한국인에게 충고할 자격이 없다"라는 제목으로 쓰신 반박문)

-  설령 일부 지각없는 사람들이 우쭐해서 과잉 표현을 좀 했다 하자. 그들의 천진한 자랑 때문에 일본의 땅 한 치 손실을 보았는가, 금화(金貨) 한 닢이 없어졌는가, 왜 그렇게 못 견뎌 할까. 그 같은 자랑조차 피해로 받아들이는 그들이고 보면 우리 한국의 천문학적 물심양면의 피해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안이 벙벙해진다.


- 거칠 것 없이 남의 팔다리 잘라놓고 뼈 마디마디 다 분질러놓고 제 자신의 새끼손가락에서 피 한 방울 흐르는 것을 보는 순간 새파랗게 질리면서 “아파! 아파!” 하고 울부짖는 형국이다. 맙소사, 이런 정도를 못 견디어 하는 증상의 원인은 대체 무엇일까.

생각건대, “한 시절 전만 해도 조선인은 우리 앞에 우마(牛馬)나 다름없는 존재 아니었나. 이제 와서 제법 사람 노릇 한다. 도저히 보아줄 수 없군.” 그런 불쾌감도 있었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에게서 문화를 조금씩 빌려 갔었던 무지하고 가난했던 왕사(往事)로 하여 사무쳐 있던 열등감 탓은 아닐까. 한국의 잘못된 점에 대해서는 신이 나서 발 벗고 나서서 떠들어대지만 좋은 것에 대해서는, 특히 문화 면에서는 애써 못 본 척 냉담하고 기분 나빠하고 깔아뭉개려 하는 일본의 심사는 어제 그제의 일이 아니었다. 그 집요함을 도처에서, 사사건건 우리는 보아왔다.




- “지각 있는 사람은 함부로 그런 말 하지 않았다”는 말을 보자. 자가당착도 이 정도면…… 미안한 얘기지만 그가 팔푼이가 아니라면 그는 우리를 팔푼이로 보았는가. 이보시오, 지각이 있어서 함부로 말을 하지 않았다고요? 함부로 말을 했다면 목이 남아 있었을까? 하기는 우리 민족 전부가 지각이 있었지. 살아남기 위하여. 지금은 총독도 없고 말단 주재소의 순사도 없다. 우리를 겨누는 총칼도 없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입을 다물어야 하는가. 어째서 일본을 성토하면 안 되는가.




- 나는 젊은 사람에게 더러 충고를 한다.
“일본인에게는 예(禮)를 차리지 말라. 아첨하는 약자로 오해받기 쉽고 그러면 밟아버리려 든다. 일본인에게는 곰배상을 차리지 말라. 그들에게는 곰배상이 없고 마음의 여유도 없고 상대의 성의를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의 힘을 상차림에서 저울질한다.”


-몇 해 전의 일이다. 일본의 어느 잡지사 편집장이 내 집을 찾아온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을 기억한다.
“일본을 이웃으로 둔 것은 우리 민족의 불운이었다. 일본이 이웃에 폐를 끼치는 한 우리는 민족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피해를 주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민족을 떠나 인간으로서 인류로서 손을 잡을 것이며 민족주의도 필요 없게 된다.”

 


 

 

아래는 <박경리 선생님과 도올 김용옥교수님과의 대화 중 일부라고 합니다. - 김용옥, 도올세설, 굼발이와 칼재비 중>

 


박경리 

김선생! 일본을 긍정적으로 볼려면 반드시 실패헙니다!



         

박경리 

일본은 야만입니다. 본질적으로 야만입니다. 일본의 역사는 칼의 역사일 뿐입니다. 

칼싸움의 계속일 뿐입니다. 뼈속깊이 야만입니다.



 

도올 

아니, 그래도 일본에서는 이미 나라 헤이안(平安) 시대 때부터 여성적이고, 심미적인 예술성이 

퍽 깊게 발달하지 않았습니까? 노리나가가 말하는 '모노노아와레' 같은.



 

박경리 

아~ 그 와카(和歌)나 하이쿠(俳句)에서 말하는 사비니 와비니 하는 따위의 정적인 

감상주의를 말하시는군요. 그래 그런건 좀 있어요. 그리구 그런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보다 

 훨씬 더 깨끗하고 순수하지요. 그러나 그건 일종의 가냘픈 로맨티시즘이에요. 

 선이 너무 가늡니다. 너무 미약한 일본 역사의 선이지요. 일본 문명의 최고봉은 

 기껏해야 로맨티시즘입니다.



 

박경리 

스사노오노미코토(素淺鳴尊, 天照大神[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의 남동생)의 이야기가 말해 주듯

일본의 역사는 처음부터 정벌과 죽임입니다. 사랑을 몰라요. 본질적으로는 야만스런 문화입니다. 

그래서 문학작품에서도 일본인들은 사랑을 할 줄 몰라요. 맨 정사뿐입니다. 치정(癡情)뿐이지요. 

그들은 본질적으로 야만스럽기 때문에 원리적 인식이 없어요. 이론적 인식이 지독하게 빈곤하지요. 

그리고 사랑은 못하면서 사랑을 갈망만 하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디 문인(文人)의 자살을 

찬양합디까? 걔들은 맨 자살을 찬양합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茶川龍之介,1892~1927),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1925~1970),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1899~1972) 모두 자살해 

죽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그들의 극한점인 로맨티시즘을 극복 못할 때는 죽는 겁니다. 

센티멘탈리즘의 선이 너무 가냘퍼서 출구가 없는 겁니다. 

걔들에겐 호랑이도 없구, 용도 다 뱀으로 변합니다. 난 이 세상 어느 누구 보다도 일본 작품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내 연령의, 내 주변의 사람들조차 일본을 너무도 모릅니다. 

어린아이들은 말할 것두 없고요. 일본은 정말 야만입니다. 걔들한테는 우리나라와 같은 민족주의도 

없어요. 걔들이 야마토다마시(大和魂) 운운하는 국수주의류 민족주의도 모두 메이지(明治)가 

억지로 날조한 것입니다. 일본은 문명을 가장한 야만국(civilized savages)이지요.





도올 

나쯔메 소세키(夏日漱石, 1867~1916)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경리 

나쯔메 소세키요? 그사람은 표절작가입니다. 구미문학을 표절해먹은 사람일 뿐입니다. 

모리 오오가이(森   鷗外)가 조금 괜찮긴 하지만 모두 보잘 것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모두 다 있는거에요. 우리가 우리를 못 볼 뿐이지요. 아니, 우리나라 사학자들이구 

민속학자들이구 문인들이 무식하게 유종열(야나기 소에쯔;柳宗悅, 1889~1961)같은 

사쿠라새끼를 놓고 걔가 조선을 좀 칭찬했다구 숭배하는 꼬라지 좀 보세요. 이거 정말 너무 

한심헙니다. 아니 걔가 뭘 알아요. 조선에 대해서 뭘 알아요. 걔가 조선칭찬하는 것은 조선에 대한 

근본적 멸시를 깔고 있는 거에요. 걔가 어떻게 조선의 위대함을 압니까?





김용옥은 박경리 어록을 도쿄대학교 중국철학과 오가와 하루히사(小川晴久) 교수에게 전달한다. 

오가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탓테이루(맞는 말이다!)"